[의학칼럼]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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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나병원 장광식 원장
[동양뉴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들판의 코스모스와 흔들리는 갈대와 억새풀, 농익어 고개 숙인 벼들이 뿜어내는 황금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매해마다 돌아오는 가을의 풍성함에 감사가 절로 나온다.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과 홍수로 전년보다 많은 수확을 거두지 못함에 농부들의 신음이 깊어졌지만, 가을이 가져다주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우리 삶과 무관하게 동일한 것 같다.
가을이 되면 먹거리가 풍성해지니 그저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매해 이맘때가 되면 산밤을 주워 정성스레 깎아다 주셨고, 직접 공수한 도토리로 묵을 쑤어 갖다 주셨다. 당연스럽게 받아먹던 가을의 간식거리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깐 밤과 도토리묵이 그립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머니가 그립다. 그래서 때론 아무리 먹거리가 풍성해도 쓸쓸함이 몰려온다. 우리 병원에 누워계신 환자분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이고, 또 부모이기도 할 것이다. 코로나 감염의 위험성 때문에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하는 환자분들이 치료만 끝나면 삼삼오오 병원 주차장 주변의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많지 않지만 병원 가장자리에는 소량의 과실수가 심겨져 있다. 감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등의 과실수를 심을 때의 나의 마음은 이왕이면 열매 맺는 나무를 심어 오가는 모든 사람이 다 따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가진 것을 서로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나라는 ‘함께’ ‘우리’ ‘동행’ ‘공동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한다. 땅덩어리가 작다보니 옛날부터 한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공동체 의식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런데 산업화, 근대화가 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서양의 개인주의로 대체되어 모두가 제각각 살기에 바빠졌다.
옛날사람인 나는 이런 현시대가 썩 좋지만은 않다. 한 우물에서 물을 같이 길어 퍼먹던 시대가 때로 그리운 것은 우물물이 갈하면 함께 물을 아끼고, 풍성하면 함께 마음껏 퍼마실 수 있는 배려와 나눔이 저절로 익혀졌기 때문이리라.
성경에 이삭의 우물이야기가 나온다. 중동사막지역에서 물이 귀하기에 우물을 파서 샘의 근원이 나오면 그곳에서 정착하고 번성을 누리게 됐는데, 이삭의 번성을 시기하는 부족들이 매번 다툼을 일으키고 우물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면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우물들을 다시 파고, 또 다툼이 생기려 하면 또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 골짜기를 파도 이삭이 파면 우물물이 나왔다. 이런 이삭의 우물을 보면서 나도 우물을 깊게 파 샘물이 흐르도록 해서 나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과 나눠 마시는 꿈을 꾸게 됐다.
조그마한 병원 안에 현재 공동생활을 하는 환자와 보호자, 간병사, 직원들 모두 합치면 유량동 자그마한 이곳에 400여명이 모여 생활을 한다. 환자분들은 대부분이 뇌신경계 손상으로 신체적 기능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중에는 거의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분도 계신다. 이른 아침 회진을 할 때 지친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환자들이다. 특히 식물인간 상태로 거의 침상에서만 생활이 가능한 환자들이 내게 미세한 반응을 보일 때면 깊은 감동과 함께 내가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고 더욱 힘을 내게 된다.
현재 우리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이런 때는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걸어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나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우리의 모든 어려운 환경은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맘이 불평에서 감사로 넘어갈 것이라 여겨진다.
나와 함께 동행해주는 벗이 있으면 걷는 길이 험하고 조금 멀어도 걸어볼만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병원 안에 함께 생활하는 나의 벗들과 동행하고자 한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출처 : 동양뉴스(http://www.dynews1.com)